
언뜻 미약해 보이는 청춘의 움직임은 거대한 진동을 일으켜 울림을 마음 속에 아로새겼다. 일상의 작은 변화는 균열의 단초가 되었고, 갖가지 방식으로 뿌리를 내렸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영화 ‘해피엔드’에서 아직 단단하지 않고 불안정한 아이들이 자신들의 중심을 찾아가는 순간은 관객에게 이처럼 잊혀지지 않는 이미지를 남긴다.
개봉 3주차를 맞은 ‘해피엔드’가 적은 상영관 규모에도 꾸준한 입소문으로 누적 5만 관객을 넘어서 눈길을 끈다. 12일 영화관입장권통합전상망에 따르면, ‘해피엔드’는 12일 누적 관객수 5만8137명을 기록했다. 전국 스크린수 156개로 상영관이 비교적 적음에도, ‘웰메이드 영화’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이 같은 성과를 거뒀다. 앞서 지난 24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 네오 소라 감독과 주연 배우 쿠리하라 햐야토, 히다카 유키토의 내한 GV(관객과의 대화) 행사도 관객의 관심을 증명했다.
특히 영화는 20대 여성 관객의 비율이 높다는 점에서 더욱 시선을 모은다. 12일 CJ CGV 집계를 보면, ‘해피엔드’는 20대 관객이 44.5%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 여성이 무려 전체 관객의 71%이다.
‘해피엔드’의 수입배급사 영화사 진진은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관객들이 좋아해 주실 줄 몰랐다”면서 “N차 관람(재관람)이 많다. 두세 번 보시면서 볼 때마다 느끼는 부분이 다르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GV 행사에서도 여성 관객의 비율이 높았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포털사이트 네이버에도 “미래의 이야기인데 오래된 추억을 보는 듯”(ad******), “한때는 내인생의 전부였던 친구라는 존재에 대하여”(db******), “애들이 꼬옥 껴안을 때 나도 같이 안고싶어지는 작품”(dl******), “점점 이상해져가는 세상의 불안함에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들의 선택을 하여 성장한 미래의 청춘들의 인생은 부디 해피엔딩이길”(cy******), “지진처럼 흔들리는 불안한 청춘”(pa******) 등 호평이 잇따라 오르고 있다.
약속을 잡지 않더라도 매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학교라는 공간을 졸업해 사회로 나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관객은 자신의 보편적인 기억을 떠올려 공감대를 쌓게 되는 점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관심을 얻게 한 힘이라고 수입배급사 측은 보고 있다.
영화 ‘해피 엔드’는 근미래 일본을 배경으로, 국가와 학교라는 세계 속에서 흔들리는 청춘의 우정의 한 단면을 펼쳐 놓았다. 어릴 적부터 친구인 고등학생 유타(쿠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가 교내 음악연구동아리에서 또 다른 친구 아타(하야시 유타), 밍(시나 펭), 톰(아라지)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유타와 코우가 교장 나가이(사노 시로)의 자동차를 세로로 세우는 행동을 한 뒤 학교가 범인을 색출하고, 교내 안전을 목적으로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혼란에 빠져드는 청춘의 표상을 담아냈다.
음악을 매개 삼아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이들은 AI 감시 시스템으로 인해 참담한 현실과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들만의 아지트였던 동아리실은 폐쇄되고, 제약 없이 사용하던 악기는 선생님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쓸 수 있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각자 뭉뚱그렸던 미래도 빠르게 다가온다. 비슷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청춘들은 저마다의 경로를 찾는다. 진진 관계자는 “영화를 보고 나면 우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해피엔드’가 동시대 청춘뿐 아니라 곧 다가올 일본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국가와 개인의 폭력적·억압적 현실을 보여준다는 해석도 낳는다.
영화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탓에 국가가 안전을 명분으로 국민을 통제하는 상황과 AI 시스템을 도입한 학교를 동일선상에 두고 충돌시킨다. 정책에 반발하면서 거리에 뛰쳐나와 시위를 하는 시민들과 교장실을 점거해 의견을 표명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자주 겹쳐 보여준다. 이 같은 상황에 국가는 국민의 개인정보를 손쉽게 파악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비어져 나오는 국적과 인종적 차별의 현실, 비국민의 무력감도 고스란히 드러낸다. 유타와 코우가 경찰로부터 신원정보 조회를 받지만, 자국민인 유타와 달리 재일한국인인 코우는 일종의 증명서를 요구받는 식이다.
네오 소라 감독은 “일본은 인구가 줄어들면서 노동력의 다수를 외국인 이민자들로 채워가고 있는 상황”이라며 ‘애초 일본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의 일본인에 대한 이미지는 근대에 와서 발명된 것이 아닐까. 메이지 유신 이후 ‘국민국가’가 만들어지고 제국이 형성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야기하는 일본인의 이미지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이는 최근 한국사회가 겪어온, 겪고 있는 혼란스런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는 관객들의 시선을 자아내며 ‘현실’에 대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양심 있는 일본인의 미래에 대한 한 발, 혹은 한 발 나아가려는 일본인의 자기 반성 같은 작품”(ja******), “어쩌면 곧 우리나라도 닥쳐올 미래… 보고나면 마음이 아려온다”(sh******), “막연한 청춘물일줄 알았는데, 파시즘이 창궐하는 디스토피아 세상을 사는 마이너리티들의 이야기를 대다수가 공감할 시절로 보여줬다”(ju******) 등이 관람평이 그렇다. 영화사 진진은 “우리 관객들이 한국의 상황에 이입하며 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매력적인 신인배우들도 한 몫한다”(진진)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로 아타 역 하야시 유타를 제외하고는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시나 펭, 아라지 모두 신인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오디션에서 “캐릭터에 가까운 사람”을 찾는 데 열중했다는 네오 소라 감독은 “모두 연기 경험이 없어 워크숍이 필요했다. 밍 역의 시나 펭은 미국 뉴욕에 있어 처음 1개월은 줌으로 했다. 촬영 한 달 전 다 같이 모여 실제 워크숍을 진행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같은 노력 끝에 영화를 완성한 네오 소라 감독은 2023년 다큐멘터리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의 연출자이다. ‘마지막 황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애프터 양’과 한국영화 ‘남한산성’ 등 음악을 작업한 류이치 사카모토 감독의 아들이기도 하다. 1991년생인 그는 ‘원 쇼트 슬립 패스트’, ‘더 치킨’, ‘슈가 글래스 보틀’ 등 단편영화에 이어 장편영화 연출 데뷔작인 ‘해피엔드’로 지난해 베니스 국제영화제 오리종티 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받기도 했다. 또 아시아태평양 스크린 어워드 영시네마상(데뷔작이나 두 번째 장편영화 감독에게 수여)을 받기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느낀 감정, 친구들과 함께 지낸 경험”과 “정치적 성향과 상황”을 바탕으로 이번 작품을 연출했다는 네오 소라 감독은 “2011년 3·11 후쿠시마 원전 문제”로 사회에 눈을 떴다면서 “당시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방학 때마다 일본으로 넘어가 반원전 시위에 참여했다. 청춘이 모여 토론을 많이 했다. 그런 문제의식을 갖게 되면서 친했던 친구들과 거리가 생기는 과정이 슬프기도 하더라. 그때의 경험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라고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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