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픽사의 힘은 단순히 뛰어난 기술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텔링에 있다고 생각해요. 픽사의 모토 중 하나인 ‘예술은 기술에 도전하고 기술은 예술에게 영감을 준다‘는 말처럼 높은 수준의 인재 풀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다른 스튜디오에서는 쉽게 구현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힘이 있죠. ‘엘리오’가 전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 역시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지난 18일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엘리오’가 개봉한 가운데 작품에 참여한 이재준 이펙트 테크니컬 디렉터(Effects Technical Director)가 24일 오전 진행한 화상 인터뷰에서 픽사만의 차별화된 강점을 강조했다. FX(이펙트)는 물이나 불, 연기, 폭발, 자연현상 등 물리 기반의 시각 효과를 컴퓨터 그래픽(CG)으로 구현하는 분야로, 이펙트 테크니컬 디렉터는 이를 담당하는 전문가다. 이 디렉터는 광활한 바다와 섬세한 모래 입자 효과를 구현하며 관객의 몰입도를 한층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를 통해 슬픔과 불안 등 인간의 감정을 그려온 디즈니·픽사는 이번 ‘엘리오’를 통해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주목한다. 작품은 지구에서 자신이 혼자라고 느끼는 11살 외톨이 소년 엘리오가 어느 날 갑자기 우주로 소환돼 특별한 우주 생명체 글로든을 만나며 겪는 모험을 그린다. 외계인의 납치를 꿈꾸던 엘리오는 작은 오해로 인해 지구 대표로 우주에 불려가고 그곳에서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인 글로든을 만나 특별한 우정을 쌓아가며 혼자가 아님을 깨닫는다.
● “단순한 배경 아닌..감정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독보적인 상상력과 눈을 뗄 수 없는 비주얼로 전 세계를 사로잡는 픽사답게 ‘엘리오’는 신비롭고 생기 넘치는 환상적인 우주는 물론 아름답고 사실적인 자연환경을 정교하게 구현하며 시각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이재준 디렉터는 “FX 작업에서 가장 까다로운 분야 중 하나가 물 작업”이라며 “보이는 것 외에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데이터 요소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다뤄야 하는 정보량이 방대하다”면서 “1~2초 분량의 장면을 위해 수천 대의 컴퓨터를 동시에 돌려야 한다. 바다 작업은 항상 도전적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런 기술이 집약된 장면이 엘리오가 해변가에서 우주와 교신하는 모습이다. 이에 대해 “수백만에서 수천만 개에 달하는 모래 입자의 디테일을 작업해야 했다”면서 “더 가볍게 표현할 수도 있었지만 현실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무거운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모래 역시 물만큼이나 까다롭고, 이번 작품에서 가장 도전적이었던 작업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이재준 디렉터는 캐릭터 애니메이션과 FX 작업이 지닌 접근 방식의 차이에 대해서도 짚었다. 캐릭터 작업이 표정이나 동작을 통해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영역이라면, FX는 자연현상을 통해 감정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구분했다. 실제로 픽사는 스토리의 감정과 연결된 환경 효과를 설계하는 데 집중하며 FX는 단순한 배경 효과가 아니라 감정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거친 파도는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을 표현할 수 있죠. 잔잔한 바다의 물결은 슬픔이나 고요함을 상징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점에 주안점을 두고 연출자들이 ‘이 장면에서는 어떤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길 원하는가’를 고려해서 효과를 설계하려고 해요. 캐릭터가 연기하는 것과 FX를 만드는 건 다르지만 결국 ‘감정을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죠.”
● “엘리오 에게서 과거의 나와, 아이들의 모습을 봤다”
2021년 픽사에 입사한 이재준 디렉터는 디즈니+에서 공개된 ‘카 여행을 떠나요'(2022년)를 시작으로 ‘엘리멘탈'(2023년) ‘인사이드 아웃2′(2024년) 등 굵직한 디즈니·픽사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그는 “대단한 작품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다”고 소회를 밝히면서 ‘엘리오’는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라고 털어놨다. 최근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이 디렉터에게 극중 엘리오는 더욱 깊게 다가왔다.
“엘리오는 부모님을 잃었잖아요. 엘리오는 펑펑 울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삭히고 외계인과 끊임없이 교신을 시도하죠. 그 모습이 부모님에 대한 상실, 사랑에 대한 갈구라고 느껴지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제 아이들이 생각났고, 회사 내부에서 스크리닝을 할 때마다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가 학창 시절 겪었던 외로움과 소외감도 이 작품과 맞닿아 있었다. 이 디렉터는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면서 “부끄러워서 부모님과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고 돌이켰다. 이어 “제가 찾았던 건 애니메이션이었다”면서 “엘리오의 모습에서 과거의 저와 지금의 제 아이들의 모습이 동시에 보여서 이 작품이 유독 의미가 있고 와 닿았다“고 고백했다.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은 한국 관객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2023년 6월 개봉한 ‘엘리멘탈’은 724만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지난해 6월 개봉한 ‘인사이드 아웃2’는 879만명 동원으로 6월 극장가에서 큰 흥행을 이끌었다. 2015년 개봉한 ‘인사이드 아웃’ 역시 497만명이 관람했다. 이 디렉터는 “단편적인 재미와 웃음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한국 관객들은 감정에 대한 고찰이나 철학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을 끊임없이 찾는, 높은 수준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의 감정을 계속해서 만지려고 픽사를 좋아해 줬다고 생각한다”면서 ‘엘리오’ 역시 “한국 관객들에게 정서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여지가 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픽사 애니메이션이 역사의 한 페이지라는 생각으로”
현재 약 1000여명 정도 되는 직원이 근무 중인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한국인은 약 10명에서 15명 정도로, 이재준 디렉터는 그중 한 명이다. ‘엘리오’를 연출한 매들린 샤파리안 감독은 앞서 열린 화상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작품에 참여한 한국 스태프들이 많았다”며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픽사 내부에서도, 최근 북미에서 흥행한 ‘킹 오브 킹스’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 한국 애니메이터와 애니메이션의 전 세계적인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이 디렉터는 “진부하게 들릴 수 있지만 한국인에게 느껴지는 특별한 지점이 분명히 있다“고 말을 이었다.
“한국 사회의 치열함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15년 전 미국에 왔을 때와 지금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하늘과 땅 차이에요.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죠. 정확히 어떤 이유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지금의 위상은 오랜 시간 쌓여온 축적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BTS(방탄소년단) 같은 글로벌 스타가 두각을 나타내고 전 세계가 한국 문화에 주목하면서 이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제작자, 감독, 아티스트들도 점점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 같아요.”
픽사 입사를 희망하는 후배들에게는 “왕도는 없다”며 현실적인 조언도 전했다. “픽사는 늘 좋은 아티스트를 구하려고 한다. 본인의 실력을 쌓고 좋은 때를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저 또한 그 타이밍이 맞아서 픽사에 합류할 수 있었다. 실력을 쌓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픽사의 아티스트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진 이 디렉터는 “개인적으로 픽사의 작품 하나하나가 전 세계 애니메이션 역사의 한 페이지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으로 일을 하고 있다”면서 “픽사에 있는 동안 많은 작품에 참여하고 계속해서 일하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이재준 디렉터는 최근 화두인 AI(인공지능) 기술과 애니메이션 산업의 관계에 대해 “현재 픽사는 프로덕션 단계에서는 AI를 활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AI 발전에 따라)앞으로 저의 역할과 기대치에 분명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AI가 산업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거대한 담론을 말할 순 없지만 개인적인 직업인으로서 우려와 기대가 동시에 존재해요. 많은 자본과 인력이 필요한 작업은 AI 기술을 활용하면 더 손쉽게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게 되겠죠. 물론 아직 기술적으로 충분하진 않지만 예술인으로서 더 많은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거라는 점에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픽사처럼 자본과 인재가 모인 곳에서도 모든 콘텐츠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면서 “AI를 통해 쉽고 더 빨리 만들 수 있지만 결국 중요한 건 누가, 어떤 의도로, 어떻게 기술을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도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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