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개봉한 ‘사랑의 하츄핑’과 ‘퇴마록’ 그리고 북미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킨 ‘킹 오브 킹스’에 이어 ‘이 별에 필요한’까지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의 활약이 눈부시다. 지난달 30일 전 세계에 공개된 ‘이 별에 필요한’은 넷플릭스 첫 한국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으로 2010년 단편 애니메이션 ‘코피루왁’을 시작으로 독립 애니메이션계에서 꾸준히 저변을 넓혀온 한지원 감독이 연출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 지금, ‘이 별에 필요한’은 그 변화의 중심에서 ‘K애니’의 감수성과 가능성을 증명해낸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2일 맥스무비와 만난 한지원 감독은 “독립 애니메이션계에서 오래 활동한 만큼 여러 협회나 제작진과 친분이 있는데 공개 전부터 ‘우리의 희망이다’ ‘잘해줘라’라는 응원과 부담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미소 지었다. 이어 “공개 이후 힘든 시기를 함께 견뎌낸 동료들로부터 장문의 메시지를 받기도 했고, 해외에서 함께 작업했던 애니메이터들도 연락을 줬다. 정말 많은 응원을 받았다”고 감사의 뜻을 밝혔다.
“‘사랑의 하츄핑’ 이전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 등 애니메이션에 대한 일련의 흐름이 이어졌던 것 같아요. 실사영화만 봤던 분들도 2D 애니메이션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작품을 기획·개발할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일 때 작품이 론칭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웃음)”
● 넷플릭스의 첫 번째 한국 애니메이션이 되기까지
한지원 감독은 ‘이 별에 필요한’ 이전에 카카오TV 시리즈 ‘아만자’를 통해 제작사인 클라이맥스 스튜디오와 인연을 맺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청년이 현실의 고통과 상상 속 모험을 오가는 ‘아만자’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교차하는 형식의 독특한 드라마로, 한 감독은 애니메이션 파트를 연출했고 이를 계기로 양측의 협업이 시작됐다.
“그 당시에 지금의 ‘이 별에 필요한’과 비슷한 뮤직비디오 형식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여성 우주인이 등장하고 할머니의 꿈이 손녀에게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소개한 한지원 감독은 ‘아만자’ 이후 제작사와 장편도 같이 하자는 얘기가 나왔고 곧바로 “단편 애니메이션을 장편으로 확장했고, 넷플릭스에도 제안했다”고 돌이켰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건 2020년부터였어요. 중간에 제가 연출한 애니메이션 ‘그 여름’ 개봉 등 다른 작업도 병행해서, 결과적으로는 투자가 결정된 후 2년3개월 정도 집중적으로 작업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10년이 걸려서 만드는 작품도 있을 정도로 작업 기간이 천차만별이에요. 그래서 작업 기간 때문에 힘든 건 없었어요. 다만 글로벌 플랫폼에서 공개되는 만큼 초반에 부담감 혹은 떨림 같은 것들이 있었죠.”

● 2050년 배경..그럼에도 “생활감”이 중요했던 이유
‘이 별에 필요한’은 2050년 서울을 배경으로 화성 탐사를 꿈꾸는 우주인 난영과 뮤지션의 꿈을 접어둔 재이가 만나 꿈과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내용이다.
근미래로 배경을 설정한 제작진은 익숙하면서도 미래적인 정서가 공존하는 레트로 사이버 펑크스타일의 공간을 묘사했다. ‘이 별에 필요한’에서는 턴테이블과 을지로 골목, 완전 자율주행 차량과 대형 홀로그램 등 아날로그와 첨단 기술을 넘나든다. 서울을 레트로 사이버 펑크스타일로 묘사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정서를 자아내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이 작품을 두고 봉준호 감독은 “우주와 일상을 감싸안는 섬세한 시각적 완성도”라는 추천평을 남기기도 했다.
“2050년이라는 시점이 좀 묘했어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기 때문에 ‘미래는 여기까지!’라는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게 어려웠죠. 그래도 방향을 잡을 때 ‘생활감’을 제일 중요한 요소로 봤어요.”
한 감독은 “아트 디자인을 하는 분들 중 미래를 외계 도시처럼 과감하고 이질적으로 상상하기도 하지만 저는 우리가 여전히 살아가는 느낌, 숨 쉬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면서 “그래야 캐릭터들도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살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아이디어는 주로 건축 잡지와 패션 매거진에서 얻었다.
난영과 재이가 타는 자율주행 자동차를 두고 “관련해서 다양한 콘셉트가 나와 있는데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안방 같은 공간으로 바뀔 것이라는 제안이 많아서 실제로 그런 식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수려한 작화와 유려한 빛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너의 이름은.’ ‘스즈메의 문단속’ 등으로 사랑받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이 떠올리기도 하지만 작품은 현실에 기반한 인물의 감정과 관계에 더 깊이 초점을 맞춘다. 난영과 제이가 사랑에 빠지고 서로를 만나 한층 성장하는 모습은 사랑이 어떻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다. 실제 한 감독은 이 당시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하고 있었다.
“저는 일에 중독된 사람이었는데 이때 남자친구를 만나서 꿈과 사랑에 대해 유독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극 중에서 재이가 ‘있는 그대로도 괜찮다’면서 난영이를 안아주는데, 실제 제가 연애 과정에서 얻었던 위안의 감정이 녹아 있어요.”

● 김태리 홍경..”제가 원한 난영, 제이의 모습이었다”
김태리와 홍경은 ‘이 별에 필요한’에서 목소리 연기뿐 아니라 캐릭터 구축에도 깊이 관여했다. 두 배우는 대본 리딩, 선녹음, 실사 촬영, 본녹음 등 여러 단계에 걸쳐 작품에 참여하며 캐릭터의 감정과 대사의 어미까지 한지원 감독과 함께 조율해갔다.
한지원 감독은 “애니메이션이라 해도 실제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한 연기를 원했다”면서 “김태리와 홍경이 원래 가지고 있는 에너지에 더해 아이디어도 주도적으로 제시해 줬는데 그 부분이 제가 원했던 난영, 제이의 모습과 잘 맞았다”고 돌이켰다.
“보통 캐릭터가 만들어진 상황에서 더빙을 하면 제가 해석한 캐릭터를 구현하는 것에 가깝거든요. 이미 만들어졌으니까 어떤 해석을 더하기가 어려워요. 그런데 완벽하게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배우들이 인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들어볼 수 있었죠.”
어린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1997년)를 보고 “애니메이션 감독을 마음먹었다”는 한 감독은 “애니메이션이지만 그저 깨끗하고 맑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 차원 더 들어가는 시선이 놀라웠다. 그 영향 때문인지 힘 있는 여주인공을 등장해 씩씩하게 상황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한지원 감독은 아름다운 작화 때문에 제2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라고 불린다. “너무 존경하는 감독님이라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던 한 감독은 “고유의 스타일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제 작품이 많이 나온다면 자연스럽게 그런 수식어는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제1의 한지원이라고 불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차기작은 ‘이 별에 필요한’과 전혀 다른 장르다. 크리처가 나오는 다크판타지 장르로 한 감독은 “심리적인 요소가 주된 독특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한다”고 예고했다. 그는 “‘모노노케 히메’를 보고 지금까지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꿈이 흔들린 적은 없다. 다른 장르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결국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돌아오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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